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 판 메이헤런 (문단 편집) == 개인사 == 어릴 때부터 [[미술]] 쪽으로 진로를 개척하고 싶어했으나,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 & 건축학 공부 강요 크리가 터졌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해당 분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대학 역시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건축공학 쪽으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하기 이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화가였던 바르튀스 코르텔링(Bartus Korteling)을 멘토삼아 종종 의견을 나누면서 미술가의 꿈을 꾸고 있었고, 이 시기에 얀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소개받아 큰 감명을 받았다. 어쨌든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학한 것이었기에 판메이헤런은 곧 건축학 공부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판메이헤런이 화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미술계는 인상주의 사조가 주류였는데 공교롭게도 판메이헤런은 고전화가들의 화풍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비평가들은 주류에서 벗어난 작품에 그닥 호의적인 평가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전화풍이나 흉내낼 줄 아는 구닥다리 화가라는 식으로 혹평을 가하는 비평가들도 있었는데 결국 계속되는 혹평에 시달린 판메이헤런은 '''[[복수|결국 비평가들을 엿먹이기로 작정했다.]]''' 당시 고전화풍이 찬밥신세라고 해도 만약 네덜란드 황금기의 유명화가가 그린 작품이라면 비평가들이 찬사를 늘어놓았는데, 이런 점을 노려 얀 페르메이르의 위작을 만들어 비평가들에게 보여주어 온갖 찬사를 하게 한 다음 "사실 내가 그린 [[주작]]이었다. 네놈들은 비평가라면서 안목이 그것밖에 안 되냐?"이란 말을 하여 공개적인 망신을 주려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반론도 존재하는데, 하버드 출신 예술 역사학자 조너선 로페즈(Jonathan Lopez)는, 2008년에 출판한 책을 통해 판메이헤런이 [[술]], [[담배]], [[모르핀]]에 동시에 중독되어 있었던 마약 중독자였다는 사실과 판메이헤런이 쓰고 친필 헌사까지 곁들인 책이 [[아돌프 히틀러]]의 서고에 꽂혀 있었다는 점을 들어 판메이헤런은 단순히 금전 목적으로 위작을 그려 판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결국엔 당시 콧대 높았던 평론가들에게 망신을 주긴했다.] 이에 근 4년간 페르메이르의 화풍을 완벽하게 흉내낼 수 있도록 연습하였다. 17세기에 제작된 [[캔버스]]를 구해 당시 스케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페르메이르가 사용했다는 붓과 동일한 붓을 구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 그림이 오래된 그림처럼 보일 수 있도록 [[페놀]]과 [[포름알데히드]]로 처리를 하였으며, [[베이클라이트]]를 이용해 딱딱하게 굳힌 그림을 100도~120도 사이의 높은 온도에 구워낸 후 드럼통 위에 놓고 굴려서 의도적으로 균열이 생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균열에는 검은 잉크를 흘려 채워넣는 형태로 17세기에 그린 그림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기법적인 부분에서 기존의 페르메이르 작품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도리어 그 부분이 전문가들의 눈을 속였다. 그 당시 학계에서는 페르메이르에게는 밝혀지지 않은 숨은 작품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메이헤런의 그림에서 나타난 기법상의 차이가 학계에서 추측했던 숨은 작품과 일치했던 것이다. 그래서 판메이헤런의 위작은 페르메이르 작품들 사이의 [[미싱 링크]]로 여겨졌다. [[파일:external/www.artbible.info/vmeegeren_emmaus_grt.jpg]] 그렇게 1936년 처음 완성한 작품이 『엠마우스에서의 만찬(The Supper at Emmaus)』이다.[* 판메이헤런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일화를 위작 소재로 많이 썼다. 판메이헤런의 위작에서 저런 모습의 예수는 지겹도록 볼 수 있다. 대조적으로 페르메이르가 예수를 소재로 그린 작품은 별로 없는데, 그 그림에서의 예수는 판메이헤런의 위작에서 그린 예수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ohannes_(Jan)_Vermeer_-_Christ_in_the_House_of_Martha_and_Mary_-_Google_Art_Project.jpg|많이 다르다]].] 그리고 판메이헤런은 얀 페르메이르의 전문가로 이름높았던 브레디위스 박사를 찾아갔다. 세심한 기법이 들어간 위작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브레디위스는 이 작품이 페르메이르의 작품이라 감정하였고 여러 비평가들은 명작에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하악하악]]거렸으며, 예술 협회에서는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이 그림을 사들였다. 더불어 어딘가에 묻혀 빛을 보지못할 뻔 했던 명작을 발견해낸 판메이헤런의 명성 역시 올라갔다. 비평가들을 골탕먹이려고 시작했던 작업이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자 여기에 맛들인 판메이헤런은 이제 '''[[자낳괴|돈을 위해서 위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판메이헤런은 1936년~1946년까지 페르메이르, 프란스 할스, 피터르 더호흐의 화풍을 흉내낸 위작 8편을 제작하여 공개하였으며, 그 때마다 사람들은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판메이헤런의 위작을 사들였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여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페르메이르의 경우 작품이 워낙 적다보니 이후로도 다른 사람의 작품을 오인하여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인정된 사례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나온다고 해도 크게 의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